전남의 남해안 일대에 널리 분포 전승 되어 있고 지금은 전국 각처에 보급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부녀자만의 민속놀이의 하나로 특히 팔월 추석날 밤에 대대적으로 마을 부녀자들이 떼를 지어 나와서 노래와 춤으로 원형을 이루면서 뛰는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는 단체 놀이다.
예능보유자 : 박용순, 김종심, 박종숙


진도아리랑은 진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전라남도 일원에서 유희요로 즐겨 불리고 있는 민요이다. 아리랑이 한국의 민요를 대표한다는 점에 대해 누구나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한국인의 정서에 밀착된 아리랑의 예술성은 우리의 삶을 모두 용해시킨 원천적인 자아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중 「진도 아리랑」은 가히 한국의 민요, 또는 남도 민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전라남도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에서 행해지는 진도군의 대표적인 농악 중의 하나이다. 진도의 소포걸군농악은 구전되는 계보로 보아 100여 년간 기능이 끊이지 않고 계속 유지되고 있으며 자체 보존회도 구성되어 있다. 1988년 제17회 남도문화제와 1995년 제23회 남도문화제에 진도군 대표 민속팀으로 참가해 장려상을 받은 바 있는 진도군의 대표적인 농악대다.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 : 김내식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시대적 정서를 나타내는 전통예술로 삶의 희로애락을 해학적으로 음악과 어울려서 표현하며 청중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판소리가 발생할 당시에는 한 마당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 판소리 열두 마당이라 하여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무숙이타령, 강릉매화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그 수가 많았다. 그러나 점차 소리가 길어지면서 충, 효, 의리, 정절 등 조선시대의 가치관을 담은 판소리 다섯마당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로 정착되었다.
예능보유자 : 신영희(춘향가)

남도들노래 중 진도들노래는 논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와 밭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로 나뉘는데 가사의 내용은 임에 대한 그리움·원망·충효 권장, 근로 및 인생무상에 대한 것이 많다.
예능보유자 : 박동매, 이영자

진도 씻김굿은 사령굿으로 망자의 넋을 씻겨 그 넋이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천도의례이다. 씻김굿이라는 말 이외에도 씻김굿을 마당에서 행한다 하여 마당생기 또는 똘 생기라고 일컫고 씻김을 밤에 한다하여 야락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굿은 호남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큰 굿이다.
예능보유자 : 박병원

초상이 났을 때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로, 진도 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전문 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 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예보유자 : 김애선

양손에 북채를 잡고 장구 치듯이 느린 굿거리에서 빠른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 가락으로 풀어나가며,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는 북장단과 더불어 뛰어난 춤사위를 가지고 있으며, 북놀이의 강렬함과 장구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발휘하는 신명나는 놀이다.
예능보유자 : 박강열, 이희춘, 김병천

마을 여성들이 상두꾼으로 참여해 함께 소리를 하고, 가면을 쓴 방장쇠 두 사람이 조랑말을 타고 칼춤을 추면서 잡신을 쫓는가 하면, 횃불이 등장하고 상주들의 상복 또한 특징이 있다. 특히 무악과 민요가 함께 쓰인다는 점과 여성이 상두꾼으로 따르는 장례 풍속의 독특한 점을 볼 때 민속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능보유자 : 김기선, 오주창

서기 1608년 조선광해조때 허대라는 분에 의해 홍주비법이 가족, 친척, 이웃에게 전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 고장 특유의 전통 토속 명주이다. 지초이야기 아마 단방으로 쓸 수 있는 약재 중에서 지초만큼 높은 약효를 지닌 약초는 달리 없을 것이 다. 민간에서 오래 묵은 지치는 산삼에 못지않은 신비로운 약초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기능보유자 : 김양덕

남도잡가는 모두가 입창(선소리)에 해당하나 장구를 직접 치면서 부르지는 않고 반주자가 따로 있으며, 발성법이나 시김새(표현기법)는 판소리와 비슷하여 목을 눌러내는 발성법을 사용한다. 또한 잡가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대개 평계면성(平界面聲) 내지는 시나위 청으로 흥겹게 소리한다.
예능보유자 : 강송대

닻배노래는 조기잡이 닻배에서 불리는 어로요로 닻배라는 이름은 닻을 많이 싣고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이 닻배에서 그물을 끌어올리거나 내릴 때 또 닻배를 이동시킬 때 노래를 부르는데 이것을 닻배노래라고 한다. 그중 조도면 나배도에서 불리는 노래를 닻배 노래의 으뜸으로 꼽는다.
예능보유자 : 조오환

의신대동놀이는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및 그 일원에서 집단으로 일손을 꾸려 일을 하면서 노래하는 논일소리와 밭일소리의 총칭이다. 진도에서 대동두레놀이라고 하면 대개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일노래를 지칭하는 것이다.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를 중심으로 구성된 남도들노래(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51호)가 논일소리인 것에 반하여, 대동두레놀이는 의신면을 중심으로 한 논일소리와 밭일소리를 총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층의 기단에 1층의 탑신이 매우 높고 옥개석의 폭에 비해 탑신의 폭이 좁아 가늘고 길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백제 양식의 석탑이 국토의 최남단에 있는 섬까지 퍼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독특하면서도 불규칙한 면이 많은 것으로 보아 탑 양식에 지방색이 많이 드러나던 고려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역에 따른 고려시대 석탑의 형식미 연구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다.

1665년(현종 6) 희장(熙壯), 도우(道雨) 등 9명의 조각승이 합심하여 만든 불상으로, 가운데 석가모니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 각 1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진 삼존불(三尊佛) 형식이다. 희장은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彫刻僧)으로, 쌍계사 불상은 그가 1660년대 중반까지 전라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조성한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진도 쌍계사 삼존상은 제작 연대, 조각승의 이름, 봉안처 등 조성 과정에 대한 필수적인 학술 정보를 잘 구비하고 있으며, 작품의 완성도 또한 높아 17세기 불교조각사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km의 바다가 매년 음력 2월 말에서 3월 초에 조수간만의 차로 해저의 사구가 40m 폭으로 물 위로 드러나 바닷길을 이루는데, 이때 진도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열려 진도의 민속 민요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랑디가 진도개 연구차 진도에 왔다가 바닷길이 열리는 현장을 목격하고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 감탄하여 프랑스 신문에 소개한 것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말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 선생이 말년에 기거하던 화실의 당호이며, 14평의 초가와 사랑채, 화실,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에 소치가 심은 백일홍 나무가 있다. 소치 선생은 시, 서, 화에 뛰어나 조선 후기 삼절이라 칭송받았는데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서화를 배웠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직접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으며, 49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을 깃봉으로 하여 사방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이곳에서 예술의 혼을 불태웠다.

군내면 용장리에 위치하며, 고려 원종 11년(1270) 고려가 몽고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강행하자 이에 불복하여 대몽 항쟁의 결의를 다짐한 삼별초군이 원종의 6촌인 승화 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에서 남하하여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으로 둘레가 13km 이르는 산성 안에 계단 형상의 행궁터가 남아있고 석축이 웅장하다.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으며, 현재의 남도진성은 조선시대에 재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의 둘레는 610m, 높이 4~6m로 원형에 가까운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조선 초기 왜적과 해적들의 방어를 위하여 축성된 수군만호진이다.

진도개는 다른 개와 달리 여러 가지 우수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일제하인 1938년 조선 명승고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다가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다시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도개는 옛날 석기시대에 사람이 기르던 개의 후예가 전해 내려온 한반도의 토종견으로 진도라는 섬의 특수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 수 세기 동안 적응하면서 고유의 품종으로 유지되어 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견이다. 진도개는 중형견으로 주인에게 충직하고 영민하여 주변을 청결히 하고 귀소성이 뛰어나며 수렵 본능과 용맹성이 탁월하다.

길조로 알려진 고니(白鳥)는 진도군 군내면 해안 일대와 다도해 해안에서 12월과 2월 사이에 월동한다. 고니가 날아드는 곳은 진도읍 수유리 해안 일대와 군내 간척지 담수호이다. 이곳은 한국 남해안 지역에서 월동하는 고니류 집단의 일부에 불과하나 한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유일한 월동 둥지이며 또한 한반도 서남부 해안을 거쳐 이동하는 고니 집단의 평화로운 휴식처로 알려져 있다.

쌍계사에서 연결되는 등산로를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울창한 상록수림과 만난다. 약 12,231㎡ 넓이에 동백나무,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종가 시나무, 생달나무, 차나무, 자금우, 광나무, 붉가시나무 등의 상록활엽수와 마삭줄, 멀꿀 같은 상록성 덩굴식물 등 50여종의 다양한 수목 이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는 나이가 600년(지정당시-1962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2.0m, 가슴높이 둘레 6.35m에 달한다.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 좋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어 쉼터 역할도 한다. 이 비자나무는 1,000년 전에 세워졌던 구암사 경내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임회면의 비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쉼터로, 또는 구충제를 얻는 자원으로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살아온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진도 관매리의 후박나무는 2그루가 나란히 생립하고 있는 상태인데, 나이는 약 300살 정도이며, 높이는 17m로 같고, 가슴둘레의 높이는 각각 3.72m, 3.76m이다. 이 수목은 서낭림으로 보호되어 오고 있으며, 매년 정초에 마을에서 선출된 제주가 치성을 들이고 있다. 선출된 제주는 치성을 들이기 3일 전부터 서낭당 안에서 지내며, 제사 당일 부락민의 농악소리에 맞추어서 당에서 나온다고 한다.

동거차도의 암석은 지각을 뚫고 여러 갈래의 암맥 형태로 상승하던 규질 또는 산성질 마그마가 지표 가까이 쌓여있던 화산재와 혼합(混合)하여 만들어진 페페라이트(peperite)로 추정된다. 진도군 동거차도의 유문암질 단괴는 규질 암맥이 둥근 단괴 모양으로 떨어져 나온 모습을 하고 있어, 페페라이트로서의 일반적인 중요성을 지님은 물론 규질 페페라이트의 형성과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상만사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서 있는 탑으로, 현재는 이곳에 구암사라는 새 절이 생겨 탑을 보호, 관리하고 있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층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희미하게 기둥모양을 새겼는데 특히 몸돌 부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부터 4층까지는 3단씩이고, 5층은 2단으로 줄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위로 보주(寶珠)가 남아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조각기법이 거의 형식적으로 변하고, 지붕돌 받침의 수가 일정하지 않아 고려 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사각형의 대좌(臺座)위에 사각형 광배(光背)로 등에 붙이고 앉아 있는 약사불상이다. 머리칼은 두건처럼 묘사되었으며, 사각형의 큼직한 얼굴은 짙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알맞은 입 등으로 안정되고 투박한 모습이다. 하체는 너무 높고 커서 고려 불상의 독특한 비례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대좌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배는 의자의 등처럼 보이는데 도식적인 무늬가 새겨져 있다. 불상 좌우에는 본존불과 비슷한 인상으로, 상체는 벗고 하체에 치마를 입은 신라식 보살상이 서 있으나, 고려 불상 특유의 표현법을 보여주고 있어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318년 전에 섬에 세워진 진도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조선후기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서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상량문의 연대가 강희 36년이란 기록이 나와 정확히 1697년에 건립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가장 단순한 맞배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는 보살로, 민머리를 하고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도 쌍계사의 시왕전에는 주존인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하여 현재 33구의 목조각상이 있다. 시왕은 의자에 앉아 있으며 나머지 상들은 모두 입상으로 금칠이 되어있다.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33구 중 4구는 후대에 복원된 것이다. 1993년 지장보살삼존상을 수리하던 중 도명존자상 속에서 조선 현종 7년(1666)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진도 청용사(청용선원) 소장 불교전적은 대장경류(大藏經類) 3종 36축과 일반불서(佛書) 25종 110책 등 모두 28종 146책의 불교전적으로 우리지역의 여타의 사찰에서는 그다지 흔치 않을 정도의 비교적 많은 종수와 책수를 소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2종은 고려말에서 조선초기 사이에 불복(佛腹)에 봉안할 목적으로 인출(印出)되어 지금까지도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으며, 그 현존본(現存本) 또한 매우 희귀한 실정이다. 이 화엄경(華嚴經)은 진본(晉本)과 주본(周本)의 일부로 각각 16축과 15축이 소장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왕족 승화후(承化侯) 왕온(?∼1271)의 묘이다. 왕온은 원종 11년(1270)에 고려와 중국 원나라 사이의 전쟁이 끝나고 강화로 피난하였던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대하던 삼별초의 배중손·노영희 등에 의하여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고려 원종 12년(1271)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삼별초가 크게 패하자 아들 환(桓)과 여·몽 연합군의 지휘자 홍다구(洪茶丘)에게 살해되었다.

숙종 10년(1684)에 서재(서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창립한 학계의 운영에 관한 비석으로 1714년에 건립한 철비이다. 앞면에 학계 참여 인명(11명)과 학문격려를 하는 글이 있다. 당초 이 학계는 박윤순의 아들 6형제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뒤 먼 인척들 5명이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학계에서 구입한 재산 목록(토지)을 기록하였다. 이를 통해 학계창립 이후 1714년까지 30년간 25필지 1.7결의 재산을 모은 것을 알 수 있다.

망금산성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에 있는 망금산(높이 111.5m) 정상에서 동남쪽 500m 밑의 허리에 있는 작은 봉우리(67m)에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460m이다. 이 성은 서고동저형(西高東低型)의 테뫼식 해협 관방성으로 도랑을 판 흙과 막돌을 섞어 쌓고 외벽을 깎아 접근이 어렵도록 되어있다. 망금산 관방성이 명량대첩의 역사현장이란 점은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무환자나무과의 무환자나무속 식물로 우리나라 남부의 절 및 마을 부근에 나는 낙엽교목이다. 씨는 아이들의 놀이용으로 열매는 비누대용품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초하리 무환자나무는 흉고직경(DHB) 90~96㎝, 근원직경 110~120㎝, 나무높이(H) 21~22m, 수관폭 8~11m 크기로 수령은 600년 가량이다. 정월대보름 무환자나무 밑에서 달보기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세시풍속과 전설어린 민속 문화와 전통적인 마을의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도 급갑진은 남도포수군진과 함께 전략상의 교통 국방의 요충지에 자리한다. 금갑진성은 항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기에 좋은 지리적 전략적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산지 지형과 해안 지형을 절묘하게 잘 배합하여 입지하였고 성곽도 그런 지형 조건을 활용하여 축조한 것이다. 이것은 방어에 유리하면서 해안 일대를 감시하기에 좋은 최적의 자연 지형을 선택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갑도진에 대한 기록은 세종 28년(1446)에 처음 나타난다.

전라남도 진도군 금골산에 있는 석굴의 벽면에 새겨진 이 불상은 엄지와 네번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손모양으로 보아 아미타여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신체 또한 둥글게 팽창시켰지만 입체감이 없이 평면화되어 보인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자락은 무릎까지 내려와 도식적인 물결무늬 옷주름을 이루고 있다. 가슴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 있는데, 아마도 불상에 관련된 서적 등의 복장품(腹藏品)을 넣어두었던 곳으로 보인다.

세종 19년(1437) 건립되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진되었다가 효종7년(1656)에 재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대성전에는 5성 25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명륜당, 동무, 서무, 제관실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향교 운영의 대표자를 전교라 하여 2년마다 새로 선출하고 오늘날은 한학을 했던 노인들이 유교의 성현들에게 제사 지내는 장소 정도로 알고 있지만 조선시대를 이끈 선비정신의 교육장이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진도읍 성내리 철마산 아래에 있는 읍성으로, 세종 19년(1437) 진도군으로 독립되어 지금의 자리에 성의 둘레 3,400척, 높이 11척의 읍성을 쌓고 3문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진도읍성은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군강공원 동쪽 60m, 군청 북쪽에 이르는 150m의 북벽, 서벽 및 민가 앞에 약 20m가 남아있다.

남도진성의 남문 밖을 흐르는 개울인 세운천을 건너는 2개의 무지개 다리이다. 남도진성(사적 제127호)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단운교는 옆에서 볼 때 무지개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 위에는 흙을 돋우고 잔디를 심었다. 단운교에서 약 40m 가량 떨어진 쌍운교는 개울의 너비가 단운교보다 넓어 쌍무지개 형식으로 만든 점이 단운교와 다르다. 단운교와 마찬가지로 편마암질의 다듬지 않은 돌과 강돌로 쌓아 만들었다.

진도는 정유재란때 울돌목을 중심으로 수군전이 전개되어 가장 큰 희생이 있었다. 1597년 8월 29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 이순신 장군은 9월 16일 명량에서 대첩을 거두웠으나 곧바로 신안 당사도로 후퇴해 버려 우수영과 진도는 왜군의 침략을 받았다. 당시 진도관군은 군수인 송덕일(宋德馹)이 이끌었다. 명량전때 전사한 진도사람 중 관군으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은 조응량 등 8명이고 모두 232기이다.
